
서울 작업실에서 만난 최루시아 작가는 붓을 들기 전 먼저 한글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39년 동안 한글 서예를 지켜온 그는 “자음과 모음 사이의 공간은 골목길”이라며 작품 속에 담긴 철학을 차분히 풀어냈다. 브릿지프레스는 김진영 미술감독과 함께 작업실을 찾아 그의 예술 세계와 한글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들이 제 작품을 볼 때 자음 한 번, 모음 한 번 바라보며 골목길을 거니는 것처럼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39년 동안 한글 서예의 길을 걸어온 최루시아 작가는 한글을 단순한 문자나 디자인이 아닌 ‘살아 있는 공간’으로 바라본다. 최근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삶과 작품, 그리고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손글씨의 가치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최 작가가 붓을 잡게 된 시작은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한마디였다.
“공부를 잘하는 어린이보다 글씨를 잘 쓰는 어린이가 되라.”
그 말은 그의 삶을 바꾸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펜글씨부 활동을 시작으로 대학 서예 동아리에서 서예의 즐거움을 발견했고, 졸업 후에는 출판사 생활을 접고 본격적으로 서예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서예학원을 운영하며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고, 현재는 국내외를 오가며 한글 서예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고 있다.
그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이’이다.
“자음과 모음 사이의 공간을 저는 어릴 적 골목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길을 천천히 걸으며 작품을 감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에게 한글은 완벽한 조형 언어다. 각각의 글자가 독립성을 가지면서도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균형감, 획과 획 사이의 여백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이야말로 한글만이 가진 특별한 가치라고 말한다.
해외 활동은 어느덧 55번째를 맞았다. 그러나 처음부터 길이 열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배낭 하나 메고 직접 찾아다니며 길을 만들었습니다.”
대만과 자카르타, 싱가포르 등 여러 나라의 대학과 문화기관에서 강의를 이어온 최작가는 한 외국인의 한마디를 아직도 기억한다.
“‘꽃’이라는 글자는 정말 꽃처럼 생겼네요.”
한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형태만으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 그는 한글의 가능성을 다시 확인했다고 말한다.
AI 시대에 손글씨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는 더욱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디지털 기기를 많이 사용할수록 손의 움직임은 점점 줄어듭니다. 붓을 잡고 몸을 움직이며 손끝의 감각을 느끼는 경험은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최작가에게 서예는 단순한 글씨 기술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함께 사용하는 예술이다. 17년 전부터는 즉흥무용(컨택 임프로비제이션)의 움직임을 서예와 접목하며 몸의 흐름을 선으로 표현하는 새로운 작업도 이어오고 있다.
청소년과 젊은 창작자들에게는 특별한 조언도 전했다.
“오늘도 쓰고, 내일도 쓰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일단 해보세요.”
어린 시절 성적이 좋지 않았을 때 아버지가 해주셨던 “다음에 잘하면 된다”는 말은 지금도 그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다. 그는 결과보다 계속 도전하는 태도가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최루시아 작가는 영화와 드라마에서 다양한 손글씨 대역을 맡으며 대중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질을 “전통 한글 서예가”라고 말한다.
39년 동안 궁체와 전통 서예를 기반으로 쌓아온 깊이 위에 현대적인 신체 움직임과 예술적 실험을 더하며, 그는 지금도 한글이 가진 아름다움을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해 가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최 작가는 다시 한번 한글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
“한글은 정말 아름다운 문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안을 천천히 걸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