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자가 생명이 되고 데이터가 세계가 되다
작은 점 하나가 모여 형상이 되고 수많은 입자가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생명이 된다. 권민진 작가는 오랫동안 한국화를 기반으로 생명의 생성과 변화, 기(氣)와 입자의 움직임을 탐구해 왔다. 그리고 지금 그 오랜 작업의 언어가 생성형 AI라는 새로운 기술을 만나 또 다른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권민진 작가(MJ STUDIO)의 전시 《생성의 장》이 2026년 9월 12일부터 17일까지 지음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생성형 AI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한지 프린트 약 47점과 AI 영상 2점, 혼합매체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권 작가에게 AI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작업 방식이 아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거친 그는 오랫동안 꽃과 원, 점과 입자를 통해 생명의 구조를 탐구해 왔다. 현재는 대학에서 미술과 교양교육을 담당하며 회화에서 생성형 AI 이미지와 영상, 한지 출력과 설치까지 작업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초기 작업은 꽃이라는 구체적인 생명의 형상에서 출발했다. 꽃은 원으로 축약됐고 다시 점과 입자로 환원됐다. 점과 입자가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과 응집과 분산, 중심과 수직·수평의 구조는 이후 권 작가의 중요한 조형언어가 됐다. 생성형 AI는 그에게 전혀 다른 세계를 대신 만들어주는 도구라기보다 지난 10여 년 동안 탐구해 온 세계를 새로운 형상과 매체로 확장시키는 도구다.
“10년 이상 직접 제작해 온 한국화의 구조와 생명관을 출발점으로 AI를 통해 형상·매체·시간으로 확장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작가는 기존 작품의 구조와 도상을 디지털 환경에서 재구성하고 자개와 보석, 금속과 공예적 표면 등 새로운 물질성을 실험한다. 정지된 이미지는 다시 AI 영상 기술을 만나 움직임과 시간을 얻는다.
이번 전시 제목인 《생성의 장》에서 ‘장(場)’은 이미 완성된 존재들이 놓여 있는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수많은 입자와 데이터, 이미지와 시간이 만나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계속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작가는 오랫동안 작은 점과 입자가 모이고 흩어지면서 생명을 형성하는 과정을 작업해 왔다. 생성형 AI 역시 방대한 데이터와 가능성 속에서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가 탐구해 온 생명의 생성 구조와 연결된다.
권 작가는 AI의 보이지 않는 데이터와 생성 단위를 작품 속에서 점과 보석, 작은 곰과 같은 입자로 시각화한다. 수많은 작은 곰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곰을 이루는 작품도 같은 맥락에서 출발했다. 작은 곰은 기존 한국화에서 표현해 온 기의 입자가 AI 시대의 데이터 단위와 만나 구체적인 형상으로 변화한 것이다. 큰 곰 역시 고정된 캐릭터라기보다 작은 단위가 매번 다르게 결합하며 탄생하는 새로운 생명의 형상이다.
“보이지 않는 데이터가 AI 안에서 새로운 이미지와 언어로 생성되듯 제 작품에서는 보이지 않던 입자들이 모여 새로운 생명과 세계의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수많은 작은 곰이 모여 하나의 큰 곰을 이루는 작품
여기에 무릉도원과 십장생, 일월과 산수처럼 오랫동안 생명과 이상세계를 상징해 온 전통적 도상도 등장한다. 이 이미지들은 현대 도시와 미래의 이미지와 만나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과거의 생명에 대한 상상과 현재의 데이터가 AI라는 생성의 장에서 만나 또 다른 생명과 세계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이다.
전시는 형상의 생성에서 시작해 매체의 변화와 움직임을 거쳐 실제 공간으로 확장되는 흐름을 따른다. 작가는 자신이 직접 제작해 온 한국화의 구조를 기반으로 여성과 곰, 조선의 산수와 현대·미래 도시의 이미지를 확장했다. 같은 이미지는 자개와 보석, 금속과 공예적 표면으로 변형된 뒤 다시 한지 위에 출력된다. 영상에서는 정지된 이미지가 시간을 얻고 입자가 움직이며 서로 다른 형상이 변화하고 연결된다. 전시장에서는 한지 작품과 영상, 투명한 재료와 실제 입자 형태의 설치가 이어지면서 평면에서 시작된 생성이 공간으로 확장된다.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Untitled》 시리즈도 이번 전시의 중요한 축이다. 작품 속 여성은 특정 인물의 초상이 아니라 전통과 현재, 미래를 이동하며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선택하는 존재다. 주변에는 조선의 산수와 생명의 상징, 현대 도시와 미래의 이미지가 함께 등장한다. 급변하는 AI 시대를 살아가며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작가 자신의 질문도 이 여성에게 투영돼 있다.

전통과 현재, 미래를 이동하며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는 여성을 표현한 작품
생성형 AI는 짧은 시간에도 수많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권 작가에게 가장 어려웠던 것은 AI가 만들어내는 화려한 결과 속에서 자신의 작업 주제가 묻히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아름답거나 화려하다고 해서 모두 자신의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 한국화에서 오랫동안 다루어 온 생명과 입자, 응집이라는 구조가 유지되는지를 계속 비교하고 선택하며 다시 수정해야 했다. 반대로 손으로 그려왔던 점과 입자의 세계가 AI를 거치며 여성과 곰, 새로운 도시와 생명체 같은 예상하지 못했던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났을 때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작업이 단순히 새로운 기술에서 출발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업의 가장 깊은 바탕에는 동아시아의 기(氣)와 음양에 대한 사유와 자연에서 관찰한 생명의 순환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의 진경산수화와 성리학적 자연관을 연구하면서 자연을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생명의 원리가 작용하는 세계로 바라보게 됐다. 무릉도원과 십장생, 일월오봉도와 같은 전통적 이미지 역시 인간이 오랫동안 꿈꾸어 온 생명과 지속, 조화와 이상세계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그의 작업과 연결된다.
권 작가는 관객이 처음부터 작품 속 모든 상징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먼저 한지의 질감과 자개와 보석처럼 보이는 표면을 보고 반복되는 입자와 여성과 곰, 움직이는 영상을 자유롭게 경험하기를 바란다. 가까이에서는 작은 입자 하나하나가 보이지만 조금 떨어져 바라보면 그것들이 모여 전혀 다른 하나의 생명과 세계를 이루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전시를 나설 때쯤에는 ‘나 역시 수많은 관계와 경험, 정보가 모여 계속 변화하고 있는 하나의 존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잠시 해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예술과 기술의 관계 역시 이 질문의 연장선에 있다. 권 작가는 예술이 새로운 기술을 무조건 찬양하거나 거부하기보다 그 기술을 인간이 어떻게 바라보고 사용할 것인지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통을 그대로 반복하지도 않고 새로운 기술에 자신의 작업을 맡겨버리지도 않으면서 오랫동안 축적해 온 한국화의 조형언어와 생명에 대한 사유를 새로운 기술과 능동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그가 추구하는 방향이다.
《생성의 장》 이후 권민진 작가의 실험은 더 넓은 영역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회화에서 AI 이미지로 한지 출력과 공예적 표면으로 다시 영상과 공간 설치로 이어지는 연결을 더욱 확장하고 하나의 이미지가 서로 다른 매체를 통과하면서 어떤 물질성과 경험을 만들어내는지 지속적으로 연구할 계획이다. 곰과 여성 시리즈의 세계관도 영상과 그림책, 전자책과 종이책 그리고 다양한 시각매체로 확장하려 한다.
한국화에서 시작한 하나의 점이 입자가 되고 AI의 데이터와 만나 형상을 얻었다. 그 형상은 한지를 지나 영상으로 움직이고 다시 전시장이라는 실제 공간으로 확장된다. 권민진 작가의 《생성의 장》은 ‘AI로 무엇을 만들었는가’를 보여주는 데 머물지 않는다. 오랫동안 축적해 온 한 작가의 세계가 새로운 기술과 만나 어떻게 다시 생성되고 확장되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다.
“전통과 AI, 손작업과 디지털, 인간과 새로운 생명을 서로 분리해서 보기보다 하나의 세계 안에서 계속 관계 맺으며 변화하는 존재들로 바라봐 주셨으면 합니다.”
작품 앞에서 발견한 작은 입자 하나가 어떤 새로운 생명과 세계로 이어질지 자유롭게 상상하는 것. 어쩌면 그 순간 관객도 《생성의 장》을 이루는 또 하나의 존재가 된다.
권민진 개인전 《생성의 장》
2026. 9. 12. ~ 9. 17.
지음갤러리 (마포구 동교로 144-14 )
글 | 브릿지프레스 편집부 contact@bridgepres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