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바라본 풍경과 작은 생명들, 그 시선이 작품이 되다.

9월 5일부터 8일까지 지음갤러리에서 AI·디지털 아티스트 RARRI 배지영의 두 번째 개인전 《장면 사이를 걷다》가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AI 기반 디지털 프린트를 비롯해 드로잉과 원화 등 총 29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작품 속에는 골목을 걷는 고양이, 생각에 잠긴 인물, 기계로 만들어진 물고기와 날개 달린 존재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완성된 순간이나 목적지에 도착한 장면보다 그곳으로 향해가는 과정의 시간에 오래 시선을 둔다. 전시 제목 《장면 사이를 걷다》 역시 과거와 현재,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장면 사이를 끊임없이 걸어가는 우리의 삶에서 출발했다.
배지영 작가의 작업은 생성형 AI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래픽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이미지와 이야기를 결합해왔으며 1994년 한국출판미술가협회가 주최한 《한국출판미술대전1994》에서 토이북상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이후 사진으로 표현 영역을 넓히면서 오래된 골목과 집, 문화재, 낡은 간판, 누군가 살았던 흔적처럼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수 있는 장소들을 기록해왔다. 그에게 사진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남기는 일이 아니라 사라지는 시간을 기억 속에 붙잡아두는 방법이었다.
생성형 AI를 만난 뒤 이러한 작업은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됐다. 현실에 존재하는 풍경을 기록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기억하는 장소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장면을 하나의 화면 안에서 다시 만들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2024년부터 AI 아트 영상전, VVS뮤지엄 전시, COEX SLW 서울 AI아트 공모전 수상작 전시, KINTEX 《THE AI SHOW》, DDP 《AI 전람회 : AI X Future-K Festival》 등에 참여했다.
작가는 2025년 3월 일산 가온갤러리에서 첫 개인전 《Between Light and Pixels: 빛과 픽셀 사이》를 열었고 이번 《장면 사이를 걷다》는 그의 두 번째 개인전이다.

배지영 작가는 Midjourney와 ChatGPT, Photoshop을 작업에 활용하지만 한 번의 프롬프트로 나온 이미지를 그대로 작품으로 사용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먼저 표현하고 싶은 장면과 관련한 자료를 수집하고 공간의 구조와 시대적 분위기, 빛과 색감, 인물의 의상과 고양이의 움직임 등을 살핀 뒤 종이에 러프 스케치를 한다. 이후 ChatGPT와 대화하며 계절과 시간, 빛의 방향, 인물과 고양이가 바라보는 곳 등을 구체화하고, Midjourney에서 여러 이미지를 생성한 뒤 구도와 색, 인물의 위치와 표정 등을 반복적으로 조정한다. 마지막으로 Photoshop을 통해 색감과 명암, 세부 요소를 다듬는다. 그에게 AI는 작품을 대신 만들어주는 존재가 아니라 오랫동안 쌓아온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 사진의 경험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주는 표현 매체다.
이번 전시는 두 개의 전시관을 서로 다른 시간의 공간처럼 구성했다. 1전시관에서는 여성과 남성, 기계 물고기, 날개 달린 존재, 바닷속의 님프 등 여러 시기에 제작된 상상의 장면들을 만날 수 있다. 처음부터 하나의 연작으로 제작된 작품들은 아니지만 다시 한자리에 놓고 보니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이동하는 존재, 시간과 기억, 변화라는 공통된 흐름이 드러났다. 2전시관에서는 최근 작가가 가장 집중하고 있는 고양이 작업을 선보인다. 오래된 골목과 도시, 달빛과 노을, 비 내리는 거리와 따뜻하게 빛나는 창문 사이를 작은 고양이가 걷는다. 넓은 풍경 속 고양이는 아주 작게 등장하지만 작가는 바로 그 작은 존재 하나가 도시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바꾼다고 말한다.

배지영 작가에게 고양이는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다. 현재 함께 살고 있는 세 마리의 고양이 역시 모두 길에서 만나 구조해 가족이 된 아이들이며 작가는 수년 동안 길고양이들의 밥을 챙기며 많은 고양이와 인연을 맺어왔다. 매일 같은 시간 찾아오던 고양이, 멀리서 바라보다 조금씩 가까워지던 고양이,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된 고양이와의 기억들이 작품 속에 스며 있다. 그가 오래 기록해온 낡은 골목과 집, 그리고 오랫동안 바라봐온 고양이는 얼핏 전혀 다른 대상처럼 보이지만 모두 언젠가는 사라질 수 있고 그냥 지나치면 쉽게 잊힐 수 있는 존재와 장면이라는 점에서 닮아 있다.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누구나 이전보다 쉽게 이미지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배지영 작가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어떻게 만들었는가’보다 ‘왜 이 장면을 만들었는가’가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가 무엇을 반복해서 바라보는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리는지가 결국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에게 AI는 인간의 감성이나 창작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는 기억과 경험, 상상을 더 넓게 펼칠 수 있도록 돕는 새로운 표현 도구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찾는 관객에게 작품의 의미를 어렵게 해석하기보다 천천히 작품 사이를 걸으며 마음이 머무는 장면 하나를 발견해주기를 바란다. 오래된 골목일 수도 있고 어둠 속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불빛일 수도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고양이 한 마리의 뒷모습일 수도 있다. 그 장면이 각자의 기억과 만나 잠시라도 오래 머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배지영 RARRI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 《장면 사이를 걷다》는 2026년 9월 5일부터 8일까지 지음갤러리에서 열린다.
글 | 브릿지프레스 편집부 contact@bridgepres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