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단어, 다른 방향, 언어는 세계를 바라보는 좌표계가 된다.
“앞에 것 들려주세요.” 한국 학생은 ‘이전’을 서양 학생은 ‘다음’을 떠올린다. 언어가 다르면 ‘방향’이 달라지고, 방향이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진다. 문화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지도의 형태를 바꾼다.
문화가 그리는 보이지 않는 ‘사고의 지도’
우리는 모두 같은 세상을 살고 있지만 사실은 각자 다른 ‘사고의 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앞’이라고 부르는 방향이 누군가에게는 ‘뒤’일 수 있고 나의 ‘상식’이 타인에게는 낯선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우리가 속한 ‘문화’가 우리의 인지 좌표계 자체를 다르게 설정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대학원 수업에서 ‘문화적 상대성’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교수님은 듣기 평가 상황 하나를 예로 드셨습니다.
시험 도중 한 학생이 손을 들고 “선생님, 앞에 것 다시 들려주세요.”라고 요청합니다. 만약 지금 16번 문제를 풀고 있었다면, 여러분은 몇 번을 떠올리시겠습니까?
대부분의 한국 학생은 ‘앞’을 ‘이전(previous)’ 문제 즉 15번이나 14번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서양권 학생들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에게 ‘앞(forward)’은 ‘다음(next)’ 문제, 즉 17번을 의미합니다.
같은 단어, 같은 문장이지만 머릿B속에 그려지는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언어 습관이나 오해가 아닙니다. 이는 문화가 우리의 사고를 어떻게 구조화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틀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공간’에 의존해 ‘시간’이나 ‘순서’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공간적 은유(spatial metaphor)’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은유를 그리는 방식은 문화마다 다릅니다.
한국어나 일본어 문화권에서는 시간을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봅니다. ‘과거=뒤, 미래=앞’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죠. “뒤처진 생각”은 과거의 것이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미래를 향한 다짐입니다. ‘앞날’은 다가올 미래입니다.
하지만 듣기 평가의 예시처럼, 순서에 있어서 ‘앞’은 ‘먼저 일어난 일(과거)’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라는 표현이 그렇죠. 이처럼 한국어에서 ‘앞’은 문맥에 따라 미래(future)와 과거(past)를 동시에 가리킬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집니다.
반면, 영미권의 ‘앞(forward)’은 거의 예외 없이 미래, 혹은 순서상의 다음을 향합니다. 그들의 시간관은 화살처럼 앞으로만 나아가는 ‘진행(progression)’의 개념이 강합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일부 남미 원주민 언어(아이마라어 등)에서는 놀랍게도 ‘미래=뒤’ 로 표현됩니다. 왜 일까요? 미래는 아직 보이지 않고 알 수 없으니 우리의 ‘등 뒤’에 있고 이미 경험하여 명확히 알고 있는 과거는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미래는 우리가 돌아봐야만 보이는 대상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앞’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다른 문화에서는 정반대인 ‘뒤’일 수 있습니다. 내가 ‘상식’이라고 믿는 것이, 그들에게는 ‘비 상식’일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타인을 이해하는 태도에 놀라운 여유가 생깁니다.
일상 속에서 “그게 왜 그렇게 생각돼?”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그 대답이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때, 우리는 종종 상대방이 ‘틀렸다’고 단정 짓곤 합니다.
하지만 그 대답의 방향은 단순한 논리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나와는 완전히 다른 ‘문화적 지도’를 보며, 다른 ‘인지의 좌표계’ 위에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학문이지만 그 마음은 결코 진공 상태에서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문화라는 거대한 배경 위에서 작동합니다.
내가 자라온 언어, 내가 속한 사회, 나의 내면화된 가치관이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인지의 방향을 정합니다. 그렇다면 타인의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그저 그가 속한 다른 문화적 지도를 충실히 따라가고 있는 여정일 뿐입니다.
‘앞’을 어디로 정의하느냐는 사소한 문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소한 정의들이 모여 세상을 인식하는 거대한 틀을 만듭니다.
진정한 소통과 이해는 나의 좌표계가 유일한 정답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나의 ‘앞’과 너의 ‘앞’이 다를 수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박지현| 브릿지프레스 칼럼니스트, 마음나침반 대표, 교육 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