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단순 반복 업무를 넘어 법률·의료·회계 등 전문직의 핵심 과업까지 빠르게 흡수하면서 안정적이라 여겨졌던 전문성의 기준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법률·의료·회계 등 전문직 영역에서 AI 활용이 급격히 확산되며 직업의 외형은 유지된 채 내부 업무 구조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인공지능(AI)의 확산이 노동 시장 전반에 구조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그동안 비교적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법률·의료·회계 등 전문직 영역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AI는 단순 반복 업무를 넘어 계약서 초안 작성, 판례 검색, 의료 영상 판독, 초진 분류, 회계 장부 정리와 리스크 탐지 등 전문 영역의 핵심 과업까지 빠르게 대체하거나 보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논의의 초점도 ‘AI가 직업을 없앨 것인가’에서 ‘내가 수행해온 핵심 업무가 AI로 대체 가능한 구조였는가’로 이동하고 있다.
전문직이 위협받는 이유는 직함 자체가 아니라 그 직함을 지탱해온 업무 단위가 재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나 의사, 회계사라는 직업은 유지되지만, 그 내부를 구성하던 분석·판단·문서화 작업은 기술에 의해 빠르게 표준화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효율성 개선을 넘어 전문직 내부에서 누가 어떤 역할로 인정받는지에 대한 기준 자체를 흔들고 있다.
AI는 직업 전체를 한 번에 대체하지 않는다. 대신 그 직업을 구성하는 핵심 업무를 하나씩 흡수해 나간다. 과거에는 오랜 교육과 자격 취득을 통해 확보한 전문성이 독점적 지위로 작동했지만 이제는 그 지위가 자동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전문직의 진입 장벽은 여전히 높지만 전문성을 유지하는 장벽은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전문직의 위기는 사라짐이 아니라 내부 구조의 해체에서 시작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변화는 개인 차원의 불안에 그치지 않는다. 자동화의 안전지대로 인식돼 왔던 화이트칼라 고소득 직무가 오히려 가장 먼저 흔들리고 있다. 성실한 교육과 자격 취득이 안정적인 미래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회적 약속도 약화되고 있다. 동시에 전문직 내부의 격차는 확대되고 있다. AI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문가는 생산성과 영향력을 빠르게 키우는 반면 기존 방식에 머무는 전문가는 경쟁력을 잃고 있다. 동일한 자격을 갖고도 결과가 크게 갈리는 상황에서 기술 격차는 곧 소득과 기회의 격차로 이어지고 있다.
전문직이 선택해야 할 방향은 기술과의 경쟁이 아니라 역할의 재정의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앞으로의 전문성은 지식을 많이 보유하는 능력보다 AI가 제시한 결과를 해석하고 검증하는 판단력, 윤리와 책임, 맥락을 고려해 최종 결정을 내리는 인간의 역할, 그리고 고객·환자·의뢰인과 신뢰를 형성하는 관계 역량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 따라 전문직 교육과 훈련 역시 암기와 이론 중심에서 벗어나 AI 도구 활용, 데이터 해석, 문제 설계 능력을 핵심 역량으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술 전환기에 따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재교육과 직무 전환을 지원하는 사회적 안전망 강화의 필요성도 함께 제기된다.
AI의 확산은 전문직의 종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전문성의 기준을 다시 묻고 있다. 지식 전달자이자 반복 업무 수행자로서의 역할은 줄어들 수 있지만 해석자이자 판단자, 책임자로서의 전문성은 오히려 더 중요해지고 있다. 지금은 전문직의 몰락이 아니라 전문성이 재편되는 전환의 시기라는 평가다. AI 시대에 경쟁력을 갖춘 전문가는 가장 많은 지식을 보유한 사람이 아니라 기술과 함께 가장 깊이 사고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허성희 미디어 리터러시·AI 교육 전문가